벨라(Bella) - 어느 멋진 하루 이야기


10월 5일.
짧은 추석 연휴에 더해 주어진 하루의 휴식을 위해 극장에 들렀다.
공포스럽거나, 우스꽝스럽거나, 정신 사나운 영화로 연휴를 마감하고 싶지는 않다. 그저 잔잔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포스터에 끌려 '벨라(Bella)'를 선택했다.

네이버 영화 리뷰 중 piajun 님의 리뷰에서 말한 것처럼, 포스터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전달되는 듯 하다. 
사람들이 없는 한적한 모래사장. 거칠게 생긴, 하지만 따뜻한 눈길을 가진 한 사내, 파도와 물 장난을 실컷 하고 왔을 법한 반쯤 젖은 빨간 치마를 입은 천진난만한 표정의 여자아이가 있다. 사내는 그 아이를 사랑 가득한 지긋한 시선으로 올려다 본다. 여자아이는 뒷짐을 지고 배를 쑥 내밀고 그에게 다가선다. 그는 서둘러 보채며 안을 것 같지 않다. 곁에 있고,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듯한 표정이다. 그 여자아이 이름이 이사벨이었던가? Bella라는 영화제목은 흔히들 이사벨을 부르는 애칭인 듯 하다.

사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써니와 내린 영화평은 '별라'였다. '벨라, 별라네...'라고 말하고 큭큭 댄다. '별라'는 '별나다'라는 의미보다는 둘 간의 주로 사용하는 '별로'라는 뉘앙스의 단어다.
좀 미적지근하고, 덤덤하다. 잔잔한 느낌의 영화를 찾아 본 게 맞긴 하지만, 그렇다손 쳐도 뭔가 좀 허전하다. 마치 양념 많은 진한 향료의 자극성 음식에 길들여져 있다가 심심하게 간이 밴 음식을 먹은 느낌이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서 하루 이틀 지나는데 느낌이 살아난다. 묘하게 장면들이 곱씹어진다.


젊은 시절, 세상을 모두 가진 냥 성공가도를 질주하던 청년이 있다. 본의 아니게 교통사고를 일으키게 되고, 한 꼬마 여자아이를 숨지게 하고, 그에 대한 죄책감으로 하루 하루를 의미없이 산다.
사랑하지도 않은 채 한 아이를 잉태하고 만 여자가 있다. 사랑받지 못했던 가정에 대한 추억을 간직한 그녀는 그 아이에게 되풀이되는 아픔을 남기기 싫어 낙태를 결심한다. 그녀의 생활은 이미 가난에 찌들어 있고, 일하던 식당에서는 지각을 이유로 해고되고 만다.
씻을 수 없는 아픔을 가진 그가, 그녀를 따라 나선다. 그렇게 그들의 하루가 시작된다.


그가 그녀를 따라나선 건 그녀가 떨어뜨리고 간 곰인형을 집어주기 위해서였다. 지각 사유를 묻지도 않고 직장 밖으로 내친 식당 사장인 형의 행위에 대한 미안한 마음도 일부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임신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하루를 동행하기 시작한다.
어수선함이 가득한 뉴욕 한복판에서 전철을 타고, 거리를 걷는다. 그들의 하루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다들 바쁘고 분주하다. 그 속을 헤집고 지나가는 그들에게 한 거렁뱅이가 말을 건넨다. 종이로 접은 개구리를 보여주며,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을 설명해 주면 그것을 주겠노라고 한다. 그는 앞을 볼 수 없는 맹인이다. 그에게 주변의 꽃과 거리 풍경을 설명한다. 그는 마음 속으로 그것을 본다. 비록 회색 도시이지만, '주님으로 인해서, 나는 볼 수 있다'던 그의 말처럼 그는 꽃이 가득한 도시 풍경을 보고 있을 것 같다.
남자의 가슴에는 아직도 아픈 과거 속의 기억-오열하는 엄마 품에 안겨 숨진 여자아이-이 남아 있다. 낙태를 하겠노라고, 이 아이에게는 과거의 나처럼 내가 선택하지 않고도 겪어야 했던 쓰린 과거를 남기지 않겠노라고 울먹이는 여자를 본다.



그는 그녀를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향한다. 그녀에게 자신의 과거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의 형 역시 입양되었던 형제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철없는 동생은 사귄 지 일주일 밖에 되지 않은 여자친구를 선보이면서 결혼할 거라고 선언한다. 멕시코 식탁은 잘 차려진 풍성한 음식만큼이나 정겹고 유쾌하고 행복하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도 그저 눈빛을 보면서 즐겁다. 그녀가 느끼지 못했던 가족이라는 단어는 이렇게, 배가 달라도, 언어가 달라도,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도 버무려 낼 수 있는 퀘사디아 같은 맛이 있다.
그의 집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그녀는 다시 갈 길을 재촉한다. 그는 그녀가 떠나기 전 바닷가를 보여준다. 날은 저녁에서 밤으로 향하고, 그들이 들고 간 등불은 더욱 밝게 타오른다. 살며시 기대어 보는 그의 어깨가 듬직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 자신의 갈 길로 돌아간다.



시간이 흘러 어느 날, 이제 그는 아픈 과거 속의 여자아이를 연상케 하는 여자아이와 해변에 있다. 그녀에게 소라 껍데기를 주면서 바다를 담아갈 수 있다는 걸 알려준다. 귀에 댄다. 바다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는 바다가 너무 가까이 있어서일 거라고 한다. 바다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아이는 소라 껍데기를 귀에 가져다 댄다. 그 속에 바다가 담겨 있다. 그렇게 앉아 있는 그들에게 그녀가 온다. 아이에게 혹시 나를 아는지 묻는다. 눈을 반짝이며 '엄마'라고 답한다. 그렇게 영화는 끝난다.



원죄처럼 과거의 멍에를 짊어진 채 살던, 앞으로 살아가게 될지도 모르는 두 남녀의 이야기다.
그들에게 주어진 특별한 하루를 통해 그들은 짐을 내려놓게 된다.

맹인 거렁뱅이의 말대로 특별한 눈이 필요하다. 지금 내가 보고 있고 생각하고 있는 게 전부가 아니다. 눈을 감고 보면 과거의 기억, 현재의 시련이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
소라 껍데기는 바닷가에서 잘 들리지 않는다. 그 곳에서 조금 떨어져야만 그 곳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어쩌면 단 하루의 일탈이 더욱 주변을 사랑스럽게 만든 듯 하다.

영화는 두 사람의 치유의 과정을 담담하게 그린다.
무리하게 그와 그녀를 짜맞춰 짝을 지어주지도 않고, 입양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마무리한다. 그들에게 이제 아픈 과거는 없으며, 해맑은 소녀와 같은 현실이 남는다.

이 가을, 나 역시 짊어진 짐을 내려놓고 심신을 치유할 수 있길 바라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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