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휴가 - 펜션 소무(SOMU)에서의 하루 by 영두리

늦게나마 휴가 날짜를 정했다.
프로젝트 기간 중 휴가를 떠난다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니었으나, 조금이나마 일상을 떠나지 않으면 머리가 터질 것 같았더랬다.
어렵게 휴가 날짜를 정하고 보니 버릇처럼 일정 편성 작업이 남는다.
서둘러 잡은 일정에 행선지를 정하기가 쉽지 않다.
너무 피곤하지 않게, 너무 빡빡하지 않게, 그냥 쉴 수 있는 곳으로 정하기로 한다. 그래 이번 여행의 주제는 '쉼(休)'으로 하자.

인터넷을 뒤적거리다가 발견한 곳이 안면도에 있는 '소무'라는 펜션이다.
정확한 한자는 어떻게 표기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홈페이지를 보니 '맑고 정갈한 집'이라는 의미를 가진단다.
또한, 와인과 관련된 '소믈리에(Sommelier)' 단어에서 따온 네이밍이라고 한다.

이런저런 점을 고려하다가 행선지로 결정하고, 예약을 하고 입금을 한다.
고려사항은 다음과 같다.

안면도에 위치하고 있지만 바닷가에 있지는 않다.
- 휴가철의 끝자락이지만 피서객 틈 속에서 번잡하게 부대끼고 싶지 않았는데 잘 되었다 싶다.

간단한 아침식사가 제공된다.
- 작년 가을 노벰버, 올해 봄 마이대니에서 보여준 B&B(Bed & Breakfast) 류인 듯 하다. 아침 식사를 차리거나 식당을 찾아 돌아다닐 일 없어 보인다.

바비큐 서비스를 무척 강조하고 있다.
- 바비큐용 고기와 야채 등을 가지고 오면 웨버 그릴에 숯을 넣고 구워먹을 수 있다. 석양을 보면서 바비큐에 와인 한 잔 곁들이면 꽤 괜찮을 것 같다.

TV가 없다.
- 심심할 것 같지만 TV가 없는 것도 나름 괜찮을 것 같다. 구입한 후 바쁘다는 핑계로 읽지 않고 있던 책을 챙겨갈까 싶다. 노트북용 무선 AP는 설치되어 있다고 하니 노트북 정도는 챙겨가야겠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둘만 떠나는 여행이라서 큰 방을 예약할 필요는 없다. 원룸 스타일의 작은 방을 선택한다. 성수기가 끝난 시점이라 비수기 평일 요금인 8만원을 받는다.
음식을 손수 만들어 먹는 것도 이번 여행의 목적인 '쉼'과는 다소 이질적으로 느껴져서 그냥 2인분에 5만원인 '마리안 세트'를 준비해 달라고 말하고 입금해 버렸다.

드디어 출발.
생각 같아서는 써니 매장에서 와인과 잘 어울리는 치즈타르트나 뉴욕치즈케익 정도를 함께 데리고 가고 싶었지만, 여름 나들이에 케익을 실고 다니면 신경이 쓰이기에 매장 쇼케이스에 고이 모셔두고 떠난다.
또 생각 같아서는 와인 하나 미리 챙겨서 가져갈까도 싶었지만, 코키지 비용도 따로 받지 않는다고 홈페이지에 씌여 있긴 하지만, 그냥 그마저도 귀찮아서 그곳의 와인을 추천받기로 생각하고 떠난다.
극히 단촐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딸랑 1박을 위한 옷가지가 들어있는 가방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카메라 가방과, 그리고 노트북 하나가 짐의 전부다.

서산 시내에 들러 '진국집'이라는 곳에서 '게꾹지'라는 걸 먹고는, 내비게이션에 펜션 주소를 입력하고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차를 몬다.
태안반도로, 안면도로, 부지런히 길안내를 한다. 내비게이션을 달고 나니 지도 보기에 게을러진 게 사실이다. 가만 보니 예전에 안면도에 바람 쐬러 왔을 때 쭈욱 훑어지나갔던 적이 있는 메인도로다.
내비게이션에 적혀 있는 목적지까지 남은 거리가 점점 줄어들더니, 이내 어설픈 동네 골목으로 좌회전하라는 안내가 나온다. 기계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 안 그러면 마구 투덜댄다. 이건 기계가 명령하고 사람이 그 지시에 따라 운전하는 묘한 시스템이다.
골목으로 접어들어가 얼마 가더니만 마을 한복판에서 난데없이 소임을 다했다는 냥 안내를 종료한다. 전방에 보이는 논, 그리고 그 너머 숲 옆으로 펜션이 보인다. 목적지까지 안내는 하지 않았지만 대충의 소임은 다한 게 맞긴 하다.


여름 햇살 속에 탱글탱글 쌀이 익어가고 있는 논. 그 사이로 좁게 나있는 포장도로를 타고 달리면 비닐 하우스 너머에 펜션 소무가 보인다. 소무를 중심으로 좌측으로는 숲이 시작하고, 우측으로는 밭이 시작된다. 평범한 시골 풍경 속에 덩그렇게 이국적으로 생긴 집이 다섯 채 모여있다.


앞에 놓인 건물은 사람들이 들고날 수 있는 '떼루아'라는 공간 역할을 한다. 2층은 숙박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나머지 숙소에 해당하는 건물들은 죄다 언덕배기에 있다. 비탈에 지어진 터라 나무계단을 타고 오르게 되어 있다. 키작은 수목이 한껏 곡선을 살려 만든 계단을 안내한다.


소무에 와서 맨 처음 접하는 곳이 바로 이곳 '떼루아'다.
좀 일찍 도착한 탓일까? 너무 조용하다. 실내화로 갈아신고 들어서서 손님이 왔음을 알린다. 주방에서 뭔가를 만지작거리던 직원이 문을 얼른 닫으라고 재촉한다. 주변에 산재한 벌레들 때문일까? 근처에 고양이 한 마리가 어슬렁거린다던데 고양이 때문일까? 왠지 뭔가 실수한 사람처럼 서둘러 문을 닫는다.



잠시 앉아서 '사장님'이 나오실 때까지 기다리라고 한다.
홈페이지를 너무 자주 봤던 탓일까? '사장님'이라는 호칭이 낯설다. 차라리 홈페이지에서처럼 '마리오'님이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다. 오랜만에 떠난 '쉼'의 공간에서까지 '사장님'이라는 단어를 마주해야 한다는 게 살짝 신경이 쓰인다. 순간, 휴가 떠나기 전 진행하고 있던 프로젝트마저 떠올릴 뻔 했다.
긴 테이블에 앉아서 오렌지 쥬스를 마시며 두리번거린다. 인포메이션 데스크가 따로 없으며, 오리엔테이션을 직접 사장님이 하시나 보다.
잠시 후 사장님이 오신다. 간단한 인사. 안면도가 첫 방문인지를 묻고, 지도를 보여주면서 가볼만한 곳을 이야기해 주고, 객실 키를 건네주고, 식사 관련 사항과 퇴실규칙 등을 설명해 준다. 방충망을 열지 말라는 당부도 곁들인다. 왠지 지극히 사무적이라는 느낌마저 든다. 이상하게 따뜻하게 꾸며진 공간이 딱딱하게 느껴진다.


맞다.
소무에 도착해서 내리려고 할 때 쯤, 라디오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접했다. 처음에는 라디오 진행자가 청취자 사연을 읽다가 실수한 것일 거라고 생각했고,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뜬금없이 '김대중 대통령을 추모하며...' 운운하는 게 혹시 노무현 대통령을 잘못 읽은 게 아닌가 싶었으니까, 좀더 귀기울여 듣다 보니 영면에 드셨다는 걸 알게 되고 한참을 차에 앉아 있었더랬다.
'결국에는...' 하면서 써니와 한동안 말없이 생각에 잠기기도 했었다.
그래서였을까? 자리가 좀 불편하다. 사장님도 어쩌면 그래서였을까 싶다.
유독 떼루아 곳곳에 놓인 와인에 눈길이 간다. 잘 마시지 못하는 술이지만 오늘은 아무래도 친해져야 할 것 같다.



건물 외부에 있는 2층 계단을 올라 '마뇰'이라는 이름을 가진 숙소 입구에 선다. 코르크 마개에 연결된 룸 열쇠를 철대문에 꽂고 딸깍 돌려 연다.
아담한 방이 펼쳐진다. 원룸형이고 취사공간이 따로 없다보니 정말 아담한 느낌이다. 원룸형인 방 공간에 비해서 욕실은 충분히 널찍하다.



침대, 냉장고, 스탠드 등, 의자와 쿠션, 벽걸이 에어컨, 와인 잔, 책과 잡지 몇 권, 가지런히 개켜둔 수건이 들어있는 바구니....
홈페이지에서 언급한대로 TV가 없다보니 정말 조촐한 세간이다.
우선 에어컨을 켜고, 냉장고 코드를 꽂고, 노트북을 꺼낸다.
아직도 내 귀를 의심하고 있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귀가 들은 걸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진다.
노트북을 켜고 무선 AP를 찾는다. 보안 해지된 AP 하나가 희미하게 잡히긴 하는데 한참 늦다. 노트북의 무선 인터넷 성능이 딸려서인지, AP의 신호가 약해서인지는 몰라도 페이지 하나 로딩하는데 버벅거린다. 겨우 눈으로 확인한다. 
그분께서 그렇게 떠났다. 노트북을 닫는다. 



숙소에는 자그마한 테라스가 있고, 거기에는 두 사람을 위한 티테이블이 놓여 있다.
테라스로 나갈까 하다가 방충망을 열지 말라는 말이 떠올라, 사실은 문 여닫는 것조차 귀찮아서 그냥 쳐다만 보았다. 평소 같으면 숙소 구석구석 사진으로 남겨두었을 텐데 그마저도 귀찮다. 침대에 누워서 소무 사장님이 건네준 지도를 펴들고 쳐다보기를 삼십 여 분. 몸을 이끌고 슬슬 나서보기로 한다.

예전에 안면도에 왔을 때, 1박을 하지는 않았지만 해안 쪽 도로와 내륙 메인도로를 훑었던 적이 있는데, 그 때 보지 못했던 안면암 쪽이 궁금해서 차를 북쪽으로 몬다. 지도 상으로는 숙소와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 보였지만 메인도로에서 꺾어져서 한참을 동쪽으로 달린다. 막상 안면암이 있는 곳에 갔는데 차에서 내릴 생각이 없다. 내렸더라면 커다란 사찰을 잠깐 구경하고 연육교로 이어진 자그마한 섬까지 산책을 했을 텐데, 늦여름 햇살이 따갑고 무척 후덥지근하다보니 선선한 에어컨 나오는 차 안에 매인다.

저녁식사는 6시에 마련한다고 했으니 아직도 1시간 남짓 남아있다.
가까운 해수욕장이라도 들를 요량으로 다시 차를 움직여 서쪽으로 이동한다. 삼봉해수욕장 이정표가 보여서 접어들었고, 즐비한 펜션 촌을 통과해서 삼봉해수욕장에 다다른다.
안면도의 솔숲은 정말 명품이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진한 솔향이 가슴 속까지 파고드는 느낌이다. 삼봉해수욕장의 솔숲도 꽤 울창하다. 철 지난 해수욕장은 그다지 붐비지 않지만 몇몇 무리가 남아서 늦더위를 만끽하고 있다.
서둘지 않는 걸음으로 솔숲을 조금 걷다가 다시 차에 올라 숙소께로 돌아온다. 느긋하게 돌아다녔음에도 아직 시간이 남았다는 걸 확인하고 시장이 있다는 읍내로 향했다가 별 게 없다는 걸 알고 또 되돌아온다.
생각해 보니 저녁식사시간을 기다리며 이리저리 시간 때우기 운전을 한 셈이다.




숙소에 도착하여, 처음으로 우리를 맞이하던 떼루아에 들어서니 저녁식사 준비에 한창이다.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 식사가 차려지길 기다린다.
양상치에 발사믹 식초를 곁들인 샐러드가 우선 주어지고, 구운 감자 하나가 주어진다. 잠시 후, 바비큐와 소세지, 피망과 버섯을 곁들인 메인 디쉬가 차려진다. 한참 먹고 있을 때 쯤 구운 토마토와 마늘이 사이드 디쉬로 제공된다. 사실 기대했던 것보다는 좀 서툴고 아쉬운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어쩌면 내가 좀 많이 바랬었던 게 아닌가 싶다.



와인을 주문했다.
하우스 와인 Glass 가 있다고 숙소에 있는 안내판에서 본 것 같은데 Glass는 안 되고 Bottle 로만 된다고 한다. 가능할 법도 한데 직원의 말투가 좀 무심하다. 와인을 보여달라고 하고 그냥 제일 무난해 보이는 와인을 하나 고른다. Avalon California Cabernet Sauvignon 으로 3만원으로, 보통 시중에 유통하는 가격과 비슷한 듯 하다. 이 와인을 다음 날 아침까지 마셔서 모조리 비웠으니 나중 생각이긴 하지만 Bottle로 주문하길 잘했다는 생각도 든다.
식사 후 일몰을 보러 운전을 해야 해서 가볍게 목만 축이고 코르크를 닫아 들고 나선다.

일몰을 보러 꽃지 해수욕장을 향하면서 마음이 조금씩 급해진다.
해가 채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서쪽 수평선 위로 구름이 검고 두텁다. 해가 점점 그 구름께로 향하더니만,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카메라를 꺼냈을 때에는 2/3 이상 숨어버린다. 결국 기대했던 꽃지 해수욕장의 일몰은 허무하게 놓치고 말았다. 며칠 머문다면야 다음 기회를 생각하며 아쉬워하지 않았을 텐데 올 여름 마지막 기회를 놓친 것 같아 아쉬움이 밀려온다.

아니다.
일몰을 놓치고 나니 오히려 느긋해진다. 천천히 모래사장을 걸어서 바닷가로 향한다.
써니는 숫제 신발을 벗어들고 맨발로 걷는다. 한산한 해변을 거닐다가, 숨대롱만 내놓고 있는 맛조개들 구경하다가 슬슬 차를 타고 숙소로 돌아온다.

숙소는 피서지 숙박시설보다는 조용한 휴양 별장같이 느껴진다.
만실(滿室)임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조용한 손님들인 듯 시끌벅적한 소리는 없다.
TV가 없으니 뭔가 허전하다. 샤워하고 나와서 잠시 멀뚱거린다.
별이 떴더라면 전면의 너른 창을 통해 쏟아지는 별을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별마저 옅은 구름에 가렸다.

써니가 책을 펼치더니 소리내서 읽기 시작한다. 어린애한테 동화책을 읽어주는 투다.
침대를 버리고 방바닥에 자리잡고 눕는다. 써니는 다리를 베고 누워서 책을 계속 읽어준다. TV가 없으니 만끽할 수 있는 소소한 이벤트다. 책을 넘겨받고 나도 몇 장 읽는다. 책을 읽다가 재미있는 대목이 나오자 둘이 낄낄 웃는다.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와인을 꺼내 숙소에 비치되어 있는 커다란 와인 잔에 따른다.
둘만의 소중한 여행을 위해서 건배, 서로의 건강을 바라고, 영원한 사랑을 바라며 건배...


잠을 설쳤다.
도시에서는 낯선 풀벌레 소리, 그리고 동네 개짖는 소리에 뒤척이다가 잠들었었는데 새벽 2시 정도에 잠에서 깨버렸다. 옆에 있는 사람 깨지 않도록 침대에서 조심히 빠져나와 방바닥에 등을 대고 눕는다. 창 밖으로 별을 찾아보지만 없다. 다시 잡생각이 많아진다. 냉장고에 다시 넣어두었던 와인을 꺼내서 다시 한 잔 따른다. 마시고 나니 이제 딱 한 잔 정도 분량이 병에 남아 있다. 마저 마셔버릴까 하다가 아껴두기로 한다. 술기운을 빌어 바닥에서 잠들었던 것 같은데 새벽에는 침대에서 깬다.




버릇처럼 아침에 일어나서 일출을 찍을 수 있을지 체크해 보곤, 옅은 구름이 여전히 가득 깔려 있는 걸 보고 다시 잠을 청할까 하다가 그냥 혼자 카메라를 들고 나섰다.
펜션 옆에 위치한 숲길을 향해 한 5분 가량 걷다가 되돌아왔다. 인기척 없는 숲길, 축축한 기운, 벌레소리가 은근히 긴장된 분위기를 연출한다. 더군다가 여기저기 널려있는 거미줄을 뚫고 다니다 보니 이건 아침산책을 나온 게 아니라 숲길 거미줄 제거작업을 하러 나온 느낌이다.
이번에는 펜션 옆에 심어져 있는 고추밭과 옥수수 등을 구경한다. 펜션 앞에 펼쳐진 잔디밭과, 혼자 먼저 가을 분위기에 빠져 있는 나무를 감상한다. 훅, 가을이 와서 안길 것만 같다.



펜션 중간에 세워져 있는 철제 조형물이 눈에 띈다.
분명 고체임을 알면서도 주전자 때문인지 왠지 액체의 느낌도 함께 느껴진다. 주전자를 기울여 따라낸 물방울 같기도 하다. 그 물방울을 들여다 보면 펜션들이 보이고 마을이 보이고 하늘도 보이고 빤히 쳐다보고 있는 나도 보인다. 커다란 세상이 저 속에 쏘옥 들어간다.




다시 숙소에 들어가 부족한 잠을 채우고 아침식사시간에 맞춰서 떼루아로 간다. 떼루아에는 이미 다른 방 손님들이 각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담소를 나누며 아침거리를 즐기고 있다.
아침식사로 제공된 것은 간단한 빵류와 삶은달걀과 수박, 그리고 커피 등의 음료. 간단하게 아침을 때우고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뽑은 커피를 리필해서 마시고 나온다.



슬슬 출발할 시간이 다가온다.
테라스 쪽 창문을 열고 테라스로 나섰다. 조금 남아 있던 와인을 마저 잔에 따랐다. 와인 한 병을 오픈해서 이렇게 빨리 마셔보기는 처음이다. 테라스의 티테이블에 앉아 와인잔을 하늘을 향해 들어 맞춘다.

건배~.
건강을 기원하며, 사랑을 기원하며, 그리고 모쪼록 현명해지기를 기원하며... 원샷~.
잔을 들어보니 붉은 와인이 있던 공간을 파란 하늘이 채우고 있다.

짐을 챙겨 체크아웃하고 나선다.
생각이 많아서 휴가를 나섰고,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선택한 짧은 여행인데,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잡상에 빠져버렸다.
한 발 물러서려고 했었는데, 발만 잠시 빼었을 뿐 몸과 머리는 아직도 그 상황에 디밀고 있는 느낌이다.

글과 사진이 묘하게 어두워진 나날이다.
자꾸 현재 서 있는 곳이 변곡점인 냥 생각되고, 다들 바삐 움직이는데 제자리에 서 있는 것처럼 여겨지고, 숨쉬기를 하며 버티는 느낌이다.

그렇게 짧은 여름휴가 여행은 끝났다.
부메랑처럼 휙 던져졌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줄에 매달린 추처럼 다시 일상이 시작된다.
부디 주위 사람을 반추하고 나를 생각하고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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