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를 보러 야구장에 간 게 도대체 몇 년 전 일인지 가물거리네요.
맨날 주말과 주일, 매장 한 켠에서 노트북으로 프로야구 소식 들여다 보다가 결국 큰 맘 먹고 직접 관전에 나섭니다.
한 때 해태 타이거즈의 매력에 푹 빠져 지냈던 팬의 한 사람으로, 기아 타이거즈로 바뀐 후 너무 바뀌어버린 팀 컬러에 적잖이 실망도 했었지만 그래도 첫 정을 못 잊어서 꾸준히 기아 타이거즈를 응원하고 있습니다.
잠실 경기를 뒤져보고, 언제나 화끈한 경기를 펼치는 맞수 LG와의 경기가 있다는 일정을 확인한 후 서둘러 예매에 들어갑니다.
기아가 원정팀이니 3루 측 응원석으로, 좀더 가까이 보려고 블루 지정석 중 앞 줄 쪽으로 찾아봐서 예매합니다. 블루석 115 블럭 2열.
휴일을 맞이한 써니와, 매장 직원 커플과 함께 나서는 길이 무척 들뜹니다.
사실 혼자만 들떴을 수도 있습니다. 저만 기아 타이거즈 응원단이고, 써니는 그냥 부창부수로다가, 매장 직원은 왕년 두산 팬, 그의 친구는 롯데 팬이니 다국적 응원단이랄 수 있습니다.
간식거리와 마실 것을 한 보따리 사서 경기장에 들어섭니다.


시원하게 펼쳐진 녹색 구장.
경기 시작 30 여 분을 남겨놓은 상태인데, 많은 사람들이 들이차 있습니다. 경기가 시작되는 시점에서는 거의 발 디딜 틈 없이 꽉 채워지더군요.
오월의 마지막 햇살은 3루 측 관중석으로 여과없이 내리쬡니다. 미처 햇살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 못했던 우리는, 지나가는 종이모자 파는 아저씨로부터 허둥지둥 모자를 구매합니다. 최강 기아가 적혀있는 노란 방망이들도 구매합니다. 편의점에서 사온 맥주, 패스트푸드 점에서 사온 햄버거와 음료수를 먹으며, 응원 준비를 합니다.

오늘의 라인업입니다.
기아 쪽에서는 일요일의 남자 구동순 선수가 마운드를 맡습니다. 테이블 세터로는 함평에서 돌아온 한 남자 김종국 선수가 나섭니다. 종범신께서는 뒤 켠이랄 수 있는 7번으로 살짝 발뺌을 하면서 클린업 트리오와 후방 타자들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할 모양입니다.
LG에서는 다소 낯선 김광수 투수가 몸을 풀고 있습니다. 프로야구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기아 타이거즈의 경기를 즐기는 수준 정도이다 보니 다른 팀 정보에 아직 미흡합니다. 그래도 1번 타순의 우윳빛깔 박용택 선수, 2번 이대형 선수, 5번 이진영 선수 등의 명성은 익히 알고 있으므로 눈여겨 봅니다. 올해 타격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실력을 선보이는 페타지니 역시 라인업에 올려진 이름만으로도 무게가 느껴집니다.

구톰슨 선수가 가볍게 러닝을 하면서 몸을 풀다가 잠시 먼 곳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겨 있습니다.
설마... 오늘 어떤 불쇼를 할까 구상하던 것은 아닐지 살짝 걱정됩니다.

안정적인 투구로 볼넷과 사사구 없이 삼진 세 개를 뽑아냈지만, 꾸준히 안타를 허용하고 게다가 조금씩 엇박자를 보인 수비 때문에 결국 4회에 강판되고 맙니다.

소녀 어깨를 가졌다...는 뜬소문도 있지만, 타석에 서면 꾸준히 안타를 만들고, 주자로 나서면 끝없이 들락날락하며 내야진을 현혹하고, 기회만 났다 싶으면 마구 달려다니는 호타준족의 표상입니다. 이번 경기에서도 5타석에 들어서서 3안타 1포볼 2득점을 기록하며 팀의 승리에 공헌합니다.

돌아온 형저매(형, 저 매일 걸어나가요) 최희섭 선수의 스윙샷입니다.
그의 스윙은 거짓말 조금 보태면 3루 관중석에서도 느껴질 정도입니다. 홈런 아니면 삼진, 그도 아니면 포볼. 예전 해태 타이거즈 야구 스타일을 떠오르게 하는 선수입니다.
5 타석에 들어서서 비록 홈런을 기록하지는 못했지만, 볼넷 2개, 삼진 1개, 희생타 1개, 그리고 어울리지 않게 투수 앞 내야안타 한개를 곁들이며 LG 투수진의 혼을 뺏습니다.

6회까지는 참 잘 던지던 구톰슨 투수입니다. 아니, 7회 2 아웃까지의 분위기로는 일주일에 한 번 나오는 선수이니 그냥 완투해 버렷 하는 응원단의 의견이 쏟아지던 그였습니다. 위기가 와도 별로 걱정되지 않고, 그 역시 긴장하는 것 같지도 않는 상태로 꾸준히 던집니다.
4:1로 7회말에 접어들 때까지만 해도 옆에 앉아 있던 써니가 슬슬 지루해하던 차였습니다...만 그러던 그가 불쑈를 준비할 줄이야 상상도 못했습니다.

떠오르는...이라는 표현이 맞지 않을 것 같은데, 김정민 선수에게 안방을 내주고 뒤에 머물러 있다가 김정민 선수의 아킬레스건 부상 때문에 다시 돌아왔기 때문이라고 봐주시면 됩니다. 이 선수는 묘하게도 1사에 주자가 있으면 병살타로 마무리하는 경우가 많아서 조병살이라는 기분 언짢은 닉네임까지 얻었더라구요. '앉아쏴'와 같은 좋은 별명은 잊혀지는 듯 했는데, 토요일 경기에 이어서 일요일 경기까지 홈런을 내리 치면서 하위타순 주포로서의 포스를 제대로 보여줍니다.
결국 그의 홈런으로, 그렇게 의기양양하던 구동순 선수가 흔들리더니만....


7회말 2 아웃 후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LG의 뒤집기 신공에 기아 응원석은 넋을 잃습니다. 야구라는 게 이런 거구나, 특히 LG의 마법같은 역전술이 이런 거구나 새삼 깨닫습니다.
조인성 선수에게 홈런 맞았을 때 투수 교체 타이밍이었던 것 같은데, 구톰슨 투수가 버티더니만 결국 화끈한 불쑈를 선사합니다.
춥고 살짝 지루하려던 경기 분위기가 화끈 달아오릅니다.

한기주 선수의 공백을 메꾸며, 선발로 재복귀한 윤석민 선수의 빈 자리를 채우며, 틀어막기의 귀재로 떠오르고 있는 유동훈 선수입니다. 뒤집힌 경기에 소방수를 투입하는 게 좀 아니다 싶기도 하지만, 조 감독은 다시 뒤집을 수 있다고 자신했나 봅니다. 불펜에 보니 임준혁 선수도 몸을 열심히 풀고 있던데...
묵직한 공 몇 개를 툭툭 던지며 몸을 풀더니만, 주자를 3루에 둔 상태로 3번 타자 정성훈 선수와 연신 파울볼을 내면서 신경전을 펼칩니다. 결국에는 포볼로 내보내면서 최고의 위기인 페타지지 선수를 맞이합니다.

최고로 긴장된 순간.
1구 볼, 2구 볼... 3구 어렵게 스트라이크. 4구... 쳤습니다...만 김종국 선수가 철벽 수비를 보이면서 땅볼 아웃 시킵니다.
오늘 경기에서 페타지니 선수가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 게 기아 입장에서는 천만다행이었습니다. 5타수 무안타로, 4할대를 육박하는 수위타자로서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주는 성적을 거두었네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한 목소리로 응원구호를 외치고 응원가를 부릅니다. 파도타기의 물결은 내야에서 시작해서 외야로, 외야에서 시작해서 내야로 넘쳐납니다. 이미 주말전 2승을 한 느긋한 상태이지만 기왕 게임이 이렇게 된 이상 이겼으면 하는 바램이 강합니다. 이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일어서서 응원합니다.
8회 공격이 양팀 모두 허무하게 끝나고 9회 경합이 시작됩니다.
점수는 4:5.
기아는 김원섭 동무로부터 공격을 시작합니다. 구위에 눌려 별다른 공격을 해보지 못하던 정재복 투수와의 승부에서 결국 안타를 만들어 냅니다.
LG에서는 마무리 투수로 우규민 투수 카드를 내놓습니다. 7 세이브를 기록하고 있을 만큼 LG에서 믿고 열쇠를 맡기는 문잠금 투수입니다.
홍세완 타자가 보란 듯이 그에게 삼진을 당합니다. 최희섭 선수가 위풍당당하게 나섭니다. 아무리 선풍기를 돌린다 쳐도 그에게는 잘못 걸리면 넘어가는 한 방이 있습니다. 스트레이드 볼넷으로 '형저매'임을 과시합니다.
'피거솟' 김상현 선수 대신에 수비 보강을 위해 투입되었던 박기남 선수 타순에서 조 감독이 승부수를 띄웁니다. '재주리게스' 이재주 선수가 몸을 풀면서 타석에 들어섭니다.
옆에서 써니가 묻습니다. '저 타자 잘 쳐?' 나는 궁색한 대답을 합니다. '홈런을 가끔 치긴 쳐.'라고 대답하고 전광판을 보니 올해 기록이 나오는데 차마 입에 올리기 뭣합니다. 한 마디 더 거들어야 합니다. '비록 올해는 한 번도 못 쳤지만...'
그 말을 듣기라도 한 듯 믿기지 않게 안타를 쳐서 1루에 있는 김원섭 선수를 홈으로 불러들여서 5:5 동점을 만듭니다. 그리고는 안치홍 선수와 교체. 참 깔끔한 출현입니다.
1사 1, 2루의 계속된 찬스. 2 스트라이크 3 볼 풀카운트에서 친 김상훈 선수의 타격이 투수 앞을 흐릅니다. 우규민 선수가 잽싸게 2루에 던져 병살을 노려보지만, 안치홍 선수가 무진장 빨리 2루에 선착해 있습니다. 결국 타자 주자만 아웃되고 2사 .
두둥.
이제 타석에는 이종범 선수가 들어섭니다.

2회 초 김상훈 선수의 보기 드문 도루를 다소곳이 스윙으로 도와주었던 그입니다.
신의 자태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도루 때문에 선수 생활이 단축된다는 인터뷰를 내보내면서 마음을 비운 듯 언론 플레이를 하고 있지만, 언제나 집요하게 그 기록의 재물이 될 투수와 포수를 고르고 있는 느낌입니다.

주자가 1, 2루에 있으면 밀어치고, 주자가 3루에 있으면 멀리 치고, 주자가 없으면 알아서 치는 작전능력 수행에 누구보다 충실한 교과서적인 타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2 스트라이크까지 몰린 불리한 볼 카운트에서 우규민 선수의 공을 살짝 밀어쳐서 2루수와 우익수 사이에 떨어뜨리는 안타를 만들어냅니다. 주자 2명이 우르르 몰려들어오면서 순식간에 7:5로 경기를 뒤집습니다.

9회말 LG의 공격에서 박용택 선수의 볼넷과 정성훈 선수의 내야 안타로 역시 다시 한 번 매섭게 타오를 기세였으나, 유동훈 선수의 구위에 밀려 점수를 뒤집지는 못하고 경기가 종료됩니다.

거의 4시간 가까이 이어진 접전을, 직접 현장에서 보고 느낄 수 있어 즐거운 휴일 저녁이었습니다.
비록 다시보기도 안 되고, 선수들 데이터 비교도 할 수 없고, 채팅창에 쏟아지는 편파응원도 즐길 수 없는 오프라인 상태에서의 관전이지만, 너른 공간에서 마구 소리지르며 응원을 즐길 수 있는 현장 야구 관람의 묘미에 푹 빠진 하루였습니다.
올해 가을에는 야구하겠죠?
기아의 V10을 기원하며... ^^



덧글
영길_잡념가 2009/06/01 21:01 # 답글
허허.. 저 갈까 말까 하던 경기였군요.. 개인적으로는 금요일에 봉미미와 석민어린이의 경기가 더 기대가 되었지만..ㅎ
영두리 2009/06/02 10:07 #
야구장에 가서 직접 관전한다는 것을 생각지도 못했었은데, 써니의 성원에 힘입어 같이 갔더니 너무 좋더군.더군다나 응원하는 팀이 극적으로 승리하는 멋진 경기를 볼 수 있어서 더더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