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by 영두리

('꿈꾸는 모짜르트' 피아노 학원에서)



나에게 짝사랑 같은 존재로 다가오는 게 '피아노'라면 다들 웃을지도 모른다.

정식으로 피아노를 배웠던 것은 초등학교 5학년 여름부터 6학년 여름으로 딱 1년이었다.
무턱대고 주산학원을 다니는 막내아들이 안 되어 보였던지(그 때 4단 자격증을 딴 상태였다.) 다른 것 좀 배우지 않겠냐고 선친께서 물었던 것 같다. 흔히들 남자애들이 다니는 태권도 도장이나 다녔으면 싶으셨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무슨 영문인지 피아노 학원을 선택했다.
그렇게 시작한 피아노 교습은 바이엘 상권과 하권을 마치고, 체르니 30번 중 10번 정도까지 배우다가 접었다.(물론, 소나티네와 하논과 피아노명곡집 역시 체르니 진도에 맞춰서 몇 곡 연습하긴 했다.) 6학년 여름방학, 서울로 전학오면서 똑똑한 서울 애들 공부를 따라가기 위해서 피아노 학원을 그만 두었다.

중학교 2학년 때였던가, 선친께서 중고 피아노를 하나 구입해서 거실 한 켠에 놓아주셨다.
피아노 학원을 다닐 여건은 안 되는 상황이라서 교습을 받는 것은 포기하고 주로 조각악보(Piece)를 사서 혼자 즐겼다. 큰형은 혼자서 피아노를 두드리는 막내동생의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서점에 들를 때마다 한두 장씩 악보를 사다 주었다.
형님 덕분에 '슬픈 엘리제를 위한 발라드'라는 말도 안 되는 곡도 탄생했다. '슬픈 로라'로 시작해서 '엘리제를 위하여'를 좀 치다가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로 변곡되는 요상한 곡이다. 그렇게 부담없이 놀이의 일종으로 즐겼다.

어느 날, 선친께서 물끄러미 피아노를 즐기는 내 모습을 보시다가 한 말씀 하셨다.
"악기를 다루는 것은 참 멋진 일이란다. 언제 어느 장소에 있든지 악보 없이도 연주할 수 있는 그런 곡을 하나 만들어 보렴."
뭐 이런 류의 말씀이었다.

악보를 외우기 시작했다.
'슬픈 로라(La Tristesse De Laura)'라는, 그 당시 모 화장품 CF의 BGM으로 사용되었던 곡을 무척 좋아했고, 푹 빠져들었다. 초보에게 어울리는 적당한 빠르기, 곡의 무게, 그리고 느낌... 너무 좋았다.(이제서야 그 곡이 패트릭 주베(Patrick Juvet)라는 프랑스 출신 팝 피아니스트의 곡이며, 영화 주제가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무튼 무턱대고 악보를 외웠다. 심지어는 한석봉 엄마라도 되는 냥 거실 불을 끄고도 건반을 눌러본다.
지금은 자신 없지만-피아노 건반에 손을 얹어본 지 너무 오래 되어서- 서른 초반까지도 언제 어느 장소에서도 피아노만 있으면 악보 없이도 연주할 수 있는 곡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일기의 기록으로는 1989년 11월 5일에 피아노를 중고처분했다.
학력고사를 코 앞에 둔 상황이었는데, 그 날 수험생일기에는 '슬픈 로라는 이제 어디서 쳐야 하나?'라고 적혀 있을 정도로 서운했던 기억이 난다.

버릇처럼 어딘가 피아노가 있으면, 어느 샌가 슬금슬금 다가가 건반 위에 손가락을 얹고 있다. 눈치를 보면서 통통통 조심히 두드려 본다.
한 때 가슴에 담았던 짝사랑했던 여인이라도 만난 냥 한 편으로는 반갑고 한 편으로는 어색하다. 슬쩍 손을 얹었다가도 이제는 남인 냥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을 거둔다.

매주 일요일 오후, 수지사랑 카페 내 '뮤즈'라는 혼성중창단 연습이 '꿈꾸는 모짜르트'라는 피아노 교습소에서 있다.
몇 주 안 되었지만 연습시각이 되면 자동으로 발걸음이 향하고, 피아노 교습소에 들어서면 심호흡을 하게 되고, 피아노 소리를 들으면 가슴 벅참을 느낀다. 하지만, 차마 제대로 건반을 눌러보지는 못한다. 아니, 시도조차도 못했다.

고 3 이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꼭 20년 전 이후, 피아노를 가져 본 적이 없다.
가끔 피아노가 아니면 전자건반이라도 하나 구매할까 싶다가도 이내 생각을 접는다.

그냥...
그리운 것은 그리운대로 두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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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아노.. 2009/02/25 01:08 #

    피아노윗 글은 저와 이름이 같은 형의 글입니다.글을 보니까 생각이 나서...저도 몇자 적어봅니다.저는 피아노 학원을 제법 다녔던것 같습니다.주로 초등학교시절때 제법 다녔지요..지금 기억으로는..같은 아파트 동에 사는 피아노 선생님한테 배우기도 하고..아파트 상가에 있는 학원에서 배운 기억도 있고...그 학원 선생님댁에서 직접 배운적도 있고...머.. 실력은 영.. 아니라서.. 바이엘 상권이 끝나더라도 체르니는 못가고..다른 책을 몇권했던것으로 ...... more

덧글

  • 영길_잡념가 2009/02/25 00:54 # 답글

    무언가 생각이 나게 하는 글이군요..
    저는 피아노를 배우긴 배웠는데.. 바이엘 상권에서 그만 둔거로 기억하는데...
    글쎄요.. 피아노 배운다고 학원은 제법 다녔던거 같네요...
  • 영두리 2009/02/25 09:33 #

    그런 거 있잖아.
    그 존재에 대해서 정확히 아는 건 아니지만 막연히 그리워하는 그런 느낌... 그렇게 다가오는 존재라는...
    나의 경우, 학원 딸랑 1년 다닌 것에 비해서는 너무 애정이 강한 것 같기도... ^^
  • 장수정 2009/02/25 20:26 # 삭제 답글

    제가 이 슬픈로라를 피아노로 연주하고싶은데 악보가 없네여 제발 있으신 분은 제게 답변하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말부탁이에요
  • 영두리 2009/02/26 10:12 #

    참 좋은 곡이죠. 끝도 없이 차분해지는... ^^
    저는 현재 피아노도 없는지라 악보 역시 없지만, 혹시 악보 입수하게 되면 연락드릴게요.
  • 영누나 2009/02/26 00:26 # 삭제 답글

    그 때 피아노를 처분했었었나...내가 영모를 언제 처음 봤는지..가물 가물.. 내 기억 속에는 '집에 들어서자 마자 신나게 피아노 한 바탕 치고 홱 돌아서 그 다음 일을 하는 영모의 모습'이 강하게 남아 있는데..그래서 지금도 영모를 생각하면 '피아노 그 다음 글'인데..얼마나 아쉬웠을까..난 어렸을 때 피아노를 너무 배우고 싶었는데..여유가 안돼서..종이에 피아노 그려놓고 치다가..나무로 피아노를 만들어 갖고 싶다는 생각을 참 많이 했는데..그래서 꼬마들한테는 제일 먼저 피아노를 사주고는 피아노부터 시켰는데...아쉽게도 애들은 그런 열정은 안보이네..좀 더 크면..내가 배울꼬야..더 늙기 전에
  • 영두리 2009/02/26 10:20 #

    제가 그당시 손님만 오면 피아노 치던 버릇이 있어서... 제 나름대로 그게 접대(?)라고 생각했었던 듯 싶네요.
    백화점이나 쇼핑몰에 놓여 있는 피아노를 보면서 하나 사자고 할까 싶다가도, 이제는 막상 사두면 먼지만 쌓일 것 같아서 그냥 쳐다만 보고 있답니다.
    아무래도... 언젠가 현업에서 은퇴하면 당장 피아노부터 사서 빠져들지 않을까 싶은... ^^
  • 선누나 2009/02/27 22:29 # 삭제 답글

    난 그 피아노 본적이 있고, 처분해서 나도 같이 아쉬워 한적이 있다는 .....

    항상 너 생각하면 피아노랑 같이 떠올랐는데...

    내가 십여년이 지난 세월동안 간간히 너를 생각한적이 있었다는 거 너 몰랐지???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겠지만은 말이지...

    즐거운 시간 ^**^
  • 영두리 2009/03/02 01:37 #

    이제는 피아노 대신에 컴퓨터 자판 두드리며 살고 있네요. ^^
    바쁜 시기 보낸 후에 언제 식사 같이 해요. 신학기 시작 잘 하시구요...
  • 한빛 한얼 2009/06/29 22:10 # 삭제 답글

    님의 글과 댓글들이 이렇게 공감도가 높다니....슬픈 로라는 제인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타인들앞에서 연주한 곡입니다. 피아노를 배워본 적없는 제가 바이엘과 체르니 100을 치던 동생 어깨너머로 음감을 대충 익히다가
    양손 연주법을 기계적으로 연습하면서....혼자 간단한 곡만 연주하곤 했었는데
    ......

    수도여고 다닐 당시 음악 실기 시험으로 악기 선택을 해야했었죠. 피리를 불면 무조건 B이하의 점스를 받고 피아노, 플루, 바이올린, 가야금 이상의 숙련자들에겐 A를 받는 다고 하니 ...

    오기가 나서 무조건 연습해서 저도 A를 받아야 겠다고 생각했는데....시험 당일
    콘서트 연주 경험이 없었던 제가 얼마나 떨었던지....몇번이나 다시 해야했지 몰라요...
    끝나고 엄청난 박수를 받긴 했지만...음악 선생님께 연주법에 대한 지적을 받았어요. 제가 배운 경험이 없단 아셨는지 지명하고 얘긴 못하시고....둘러서 좋게 얘기하셨지만.... 속으로 다신 남앞에서 연주하지 않겟다고 다짐했었거든요... 그 이후로 피아노에 손을 댄 적이 거의 없었어요.

    훗날 친구가 반아이들이 정말 잘쳐서 박수갈채를 보낸거라고 얘기해었지만....지금 생각해보면 "무식이 용감"이라고
    무작정 오기로 덤벼든 제 용기가 가상할 뿐입니다. 라흐마니노프의 혁명, 쇼팽의 녹터언, 베에토븐 등을 치던 친구들이 무척 부러워서 저도 그 대열에 껴보고 싶었던 같아요.

    얼마전 피아노가 배달배었어요. 여기 호주는 피아노 값이 어의없게 비쌉니다. 영창 피아노 4800불에 (그것도 운이 좋아 싸게 싼거랍니다) 한국돈 450만원 정도를 치뤘는데.... 아이들이 피아노를 열심히 배우길 바래요.

    저도 늦게 나마 다시 건반을 두들기며 간단한 곡이라도 예전보단 훨씬더 감성적으로 쳤으면 하고요.
  • 영두리 2009/06/29 22:41 #

    공감도가 높으신 분을 뵙게 되어서 너무 기뻐요.
    정말 비슷한 추억으로 교집합을 이루게 되네요. 왠지 '슬픈 로라'라는 곡 이름만으로도 막연한 그리움이 느껴지는데, 그런 분이 계시다니 반갑습니다.
    아이들에게 좋은 선물이 될 거예요. 그 아이들도 언젠가 엄마의 다소 어색한 슬픈 로라에 얽힌 사연을 들으며 이 곡을 좋아할 거라 생각되구요. 먼 타국에서의 생활에 늘 기쁨과 즐거움이 깃들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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