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노선 외우기 by 영두리

한달 쯤 전 일이다.

프로젝트 때문에 서울로 출퇴근을 했다.
성산대교 근처의 사무실로, 다행히 중산마을에서 당산역까지 가는 좌석버스 노선이 있어서 그 버스를 이용하게 되었다.

87-1번.
20~30분에 한 대 꼴로 오는 버스로 까딱하다가 한 대 놓치면 정류장에서 한참을 무료하게 버텨야 한다.
가장 운 좋은 경우는 횡단보도에 걸려 있는 버스를 잡아 타는 경우다. 괜히 그런 날은 모든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 날은 버스의 오른쪽 맨 앞자리에 한 아저씨가 앉아서 운전기사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그 아저씨의 뒷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좌석 간격이 좁은 버스인 관계로 다른 자리에 앉으면 무릎에 검댕이 붙어나오기까지 하는 열악한 버스다. ㅠ.ㅠ

우연찮게 두 아저씨의 이야기에 귀기울이게 되었다. 잘 듣다 보니 내 앞에 앉아 있는 아저씨는 이번에 새로 입사해서 길을 외우고 있나 보다.

- 운전기사 : 여기서는 1차선으로 붙어야 해요. 조금 있다가 좌회전하니까..
- 신규보조 : 아, 저기서 좌회전하는 거네요. 그러면 XX번 버스랑 같은 노선으로 달리겠군요.
- 운전기사 : 예... 그 노선이랑 같이 가다가 이 차는 바로 백석역 쪽으로 빠져요.
- 신규보조 : 예...

운전기사 분은 후학을 위해 별별 코치를 다 하고 있다. 차선에 대해서, 버스 정류장에 대해서, 신호등의 변동과 손님의 탑승량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버스에 올라타는 손님이 없는 정류장이라도 하나도 빼지 않고 일일이 설명해 준다.

- 운전기사 : 근데, 버스 몬 지 얼마나 되셨어요?
- 신규보조 : 한 8년 되었어요. 내내 서울서만 몰다가 이번에 일산노선 맡게 되네요.
- 운전기사 : 전에는 몇 번 버스 몰았는데요?
- 신규보조 : XX번하고 XX번 등 여러 개 했었죠.

눈으로는 계속 전방을 주시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군대에서의 사수, 부사수 생각도 나고, 한 편으로는 매일 다니는 버스 노선이라서 그것을 이렇게까지 꼼꼼히 알려줄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다. 어찌 보면 나만의 생각이겠지만, 그리고 그것이 직업인 사람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학습이겠지만...

- 운전기사 : 이제 계속 자유로로 달리면 되요. 그러다가 성산대교로 넘어서 당산역으로 가죠.
- 신규보조 : 예... 이번에 들어와서 노선을 3개 맡았더니 좀 헷갈리기도 하네요.
- 운전기사 : 몇 번 몇 번 맡았는데요?
- 신규보조 : XX번하고 XX번요.

그랬다. 노선 하나만 맡는 것도 아니었나 보다. 이 버스까지 포함해서 3개 노선을 함께 뛰는 모양이다. 회사 내부 사정이야 잘 모르겠지만, 여기서도 순환 근무라는 게 존재하는 듯 싶다. 3개 노선을 외우다가 꼬이면 어쩌나 사뭇 기우에 빠져본다.

버스가 자유로를 달리면서 정체가 시작된다.
눈을 감는다.



버스에게는 노선이 있다.
그 노선을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 운전기사분들은 학습을 한다.
버스가 노선에서 이탈을 하면 승객에 대한 약속을 못 지키게 되는 것이다.
그 버스를 기다리던 승객들로서는 황당한 일이며, 그 버스에 탑승했던 사람들에게도 충격이 아닐 수 없다.(뭐 고속버스가 고속도로 막힐 때 국도를 달리는 것 쯤이야 목표점에만 빨리 가면 되는 승객들이므로 비유할 수 없겠지만서도..)

노선 때문에 헤매는 사람들이 많다.
이것을 거들먹거리면서 처음 원칙과 다르네, 나는 너와 안 맞네, 말을 바꾸네 등등을 내세워 이합집산을 한다.
노선에서 틀어졌으면 다시 노선 안으로 들어서도록 해야 하고, 정말로 노선이 잘못 되었다면 뜻을 모아 시정해 나가는 모습을 보였으면 싶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스스로의 노선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고 있다.
지향점이라는 것이 있고, 경유지라는 것이 있을진대, 요즘 표류함을 느낀다.
내가 스스로에 대한 버스 기사이자 승객인데 막상 펼쳐보니 노선표가 희미해져 있다.

지금 영두리는 다시금 노선 그리기 연습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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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년 5월 18일 이오공감 2006/05/18 11:53 #

    속옷과 한의학, 그리고 단상  by 크로이츠얼마 전에 무척 마음에 안 드는 기사를 읽었다. 한의학적으로 체질에 맞춘 속옷을 입는 게 건강에 좋다는 기사로, 특히 색깔별로 입는 걸 강조하는 기사였다. 한의학을...일하지 않는 젊음들  by 윌리저도 대학생활을 해본 사람으로 90년대 중반에는 아직도 어느정도 유명 대학을 나오면 쉽게 대기업 입사가 가능했고 또 우리 선배들이나 동기들도 보통 대학에 들어가서 군대에...장기기증 등록증.  by 학생그날 이후..항상 지갑에 '장기기증 등록증'을 넣어 가지고 다니는 데. 무슨 일이 있을 ...... more

덧글

  • 퓨리넬 2006/05/18 12:16 # 답글

    가장 익히기 어려운 노선은 역시 자신의 인생노선인걸까요...
    가정이라는 버스를 올바른 노선으로 운전을 하는 아버지들은 정말 대단하죠.
  • 영두리 2006/05/19 01:13 # 답글

    퓨리넬님// 인생 다 하는 날에 이른다 해도 사실 다 못 익힐 노선일지도 모르겠네요. 사실 이 글이 2년 전 글인데, 아직도 표류하는 느낌이 들곤 합니다.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 영두리 2006/05/19 01:17 # 답글

    이오공감님// 아직 이글루스에 제대로 적응 못하는 생짜인지라.. 트랙백을 따라가 보니 일별로 정리를 해두셨네요. 아직 채 이사 못해 어수선한 제 글에 트랙백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 영두리 2006/05/19 02:41 # 답글

    메인에 뜨는 것이었군요. 이제야 하나씩 적응해가는... ^^ 불쌍한 중생을 구제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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